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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지막 챕터를 앞두고 써보는 <우주의 본질> 세미나 후기 [자유글]
  • 양승희
    조회 수: 1565, 2024-07-24 12:44:42(2024-06-26)

  • 얼마 전 칠레 작가 벵하민 라바투트의 인터뷰 기사에서 한참을 눈을 떼지 못했다.   과학이 빛에 대한 연구라면 문학은 그림자에 대한 연구라 말하고 있는 그가 인터뷰 말미에 전한 '경외감'에 대한 정의는 그동안 내가 짧은 시간 별을 보며 가져왔던  생각들을 한순간에 모두 소환했다.  경외감을 느낄 때 우리는 '분노하고, 움츠리고, 기뻐하고, 축복하고, 떨어야 한다'라고 말하는 라바투트는 이러한 경외감이 지루함과 우울증에 대한 유일한 해독제라 말하고 있다.  

    뭔지 모를 매력에 끌려 뒤늦게 시작한 별 보기는 늘 "왜"라는 질문을 꼬리표처럼 달고 다녔는데  지구 반대편에 있는 잘 생긴 근육질 문신남 작가의 인터뷰가 나에게 답을 해준 셈이다.  아이피스를 들여다볼 때마다 표현할 수없이 복잡한 감정들이 한 번에 몰려오는 느낌을 받았다.  아름답다거나 경이롭다는 표현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언어의 빈곤을 겪었고 그 감정들의 단면을 정확히 알아채는 일은 쉽지 않았는데 저 남미 작가가 나 대신 내게 답해준 셈이다.  경외감이라는 단어는 사전적으로도 놀라움과 공포와 숭배와 혹은 분노까지 아우르는 단어이며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본능적인 심층의 감정들이 집약된 감정이어서 하루에도 몇 번씩 겪는 표층의 감정들과는 결이 다른 감정이다.  그리고 내게 밤하늘은 그런 경외심을 느끼기에 충분한 대상이 되었다.  


    짧은 시간 관측을 했지만 입문 초기에 이 취미가 내포한 위험성을 알아챌 수 있었다.  생각보다 빨리 매너리즘에 빠질 것 같은 의심도 들었다.  처음엔 무한히 많은 별들과 한없이 많은 대상들을 죽을 때까지 천천히 보면 되겠거니 하는 순진한 생각을 했다.  하지만 기술적 한계로 내가 직접 볼 수 있는 대상은 이미 정해져있었다.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은 내일을 그냥 그렇게 덤덤히 살아내는 것처럼 망원경으로도 그게 그거 같은 대상을 반복적으로 만나야 했다.  어제와 똑같은 오늘은 없듯 하늘에도 똑같은 대상은 있을 리 없는데 말이다.  내 시력이 감지하는 한계 내에서 처음 밤하늘을 봤을 때의 경탄과 탄성은 그리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다.   미세하게 살펴보지 않으면 그냥 다 비슷해 보이는 흐릿한 빛다발에 불과했다.  아니 미세하게라도 시야에 들어오면 감지덕지한 대상이 태반이었다.  밤하늘을 보면서 이토록 간신히 보이는 것들에서 무엇을 더 찾아낼 수 있을까 고민했다. 


    세미나 교재는 이제껏 읽어왔던 과학 교양서와는 좀 달랐다.  물리학적 상상력에 인문학적 소양을 보태 양념처럼 버무린 여타의 책과 달리 이건 그냥 교과서였다.  물리에 대한 기본은커녕 근본도 없는 내가 간신히 이 책을 끝까지 따라갈 수 있었던 것은 그간 이해도 못 하면서 습관처럼 읽어온 얼마간의 과학 교양서 덕분이다.  세미나가 진행되는 동안 머릿속 여기저기 흩어져 연결도 안 되었던 짧은 정보의 조각들이 하나씩 제자리를 찾는 기분이 들었다.  어디서 들어본 단어나 내용들이 맥락을 찾아 제 집을 찾아갔다.  출퇴근 지하철에서 주로 보았고 모르는 단어나 내용은 위키를 참조하여 꾸역꾸역 읽어나갔고 본 세미나 시간엔 복습하는 마음으로 경청했다.  


    칠레 과학자(또 칠레..) 움베르또 마뚜라나가 주창한 구성주의에 의하면 인식이란 '저기 바깥에 있는 바로 저' 세계의 표상(representation)이 아니라 삶의 과정 속에서 '어느 한' 세계를 끊임없이 산출하는 일...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우리와 무관한 '객관적' 세계란 없고 실재란 주체와 얽혀있는 구성물이라는 것.  당연한 말이지만 물체의 색은 그 물체를 떠나온 빛의 속성에 따라 결정되는 게 아니라 빛에 우리의 눈이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의해 결정된다.  결국 개인의 구조가 세계를 구성한다는 것으로 한참 전 머릿속에 인상 깊게 각인된 내용이다.  구체적인 관심을 기울이기 전 내 인식 체계 내에서의 우주는 그냥 무한한 공간이었다.  그리고 그 무한의 공간은 한낱 인간 따위가 짐작도 할 수 없는 영원한 미지의 공간이었다.  무한이나 영원이란 단어의 추상성이 더 이상의 생각을 가로막았다.  인식 활동이 세계를 구성하는 것이라면  내가 산출한 우주라는 세계는 고작 그게 다였고 추상적 의미 안에서만 우주를 이해하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이런저런 과학 책들을 읽어가면서 과학의 발전으로 우주에 대해 인간이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곤 했다.  그러니까 다들 아는 걸 나만 무지해서 몰랐던 것이다.  인간의 호기심이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이룩한 쾌거에 대해 존경심마저 품게 되었다.  인류는 생각보다 우주에 대해 많이 알아냈고 무한이나 영원이라는 단어보다 훨씬 더 실감 나게 우주가 넓다는 걸 매우 구체적으로 알려주었다.   망원경으로 별을 보면서부터는  우주라는 시공간에 대해 나름대로 억지를 써가며 거리와 시간이라는 감각을 느껴보려고 노력했는데 어느 순간 우주는 텅 빈 곳이라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인간의 수준에서 영원의 영원만큼 가야 간신히 별 하나 만날 수 있는 텅 빈 공간.  차갑고 적막한 곳이 그다음에 내 인식 체계로 구성한 우주였다.  최근까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가 세미나가 거듭되며 이것저것 배워가다 보니 요즘엔 우주가  너무나도 역동적인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 수준의 시공간에서 바라보면 텅 비고 적막한 곳이지만 거시적으로 바라보면 텅 빈 게 아니라 가득 찬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세미나를 통해 다시 가지게 된 새로운 관점에서는 쉼 없이 움직이고 변화하는 체계가 우주다.  시끄럽고 소란스러우며 살아있는 유기체 같은 우주.  


    인간이 존재와 행위와 인식 사이에서 끊임없는 관점의 변화를 가지는 건 당연한 일이고  앞으로 또 다른 정보의 그물에 접속해서 또 다른 관점을 가지게 될지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이번 세미나를 통해서 이전과 다른 새로운 시각을 더할 수 있었다.  지엽적인 정보의 추가가 아니라 큰 그림이 변하는 순간의 에스컬레이션을 즐겼다.  인간이 우주 모델의 마지막 퍼즐을 완전히 맞추는 일은 불가능하고 결국 질문할 수 없는 경계에 닿기 마련이지만  과학이라는 도구를 이용해 하나씩 채워지는 퍼즐판을 기웃거리는 것만으로도 흥미로운 시간이었다.  물리학자 김상욱은 그의 저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인간>에서 인간이 만든 허구의 체계를 연구하는 학문이 인문학이고 이는 물리학이 미치지 못하는 영역이라고 말하고 있다.  허구의 체계란 <사피엔스>에서 유발 하라리가 말한 '인지 혁명'의 토대를 이루는 추상적 사고를 말한다.  그러므로 인문학적 상상력이 결여된 과학은 공허하고 과학적 사고가 부족한 인문학은 허무하다.  어느 한 쪽에만 기대어서는 미래를 조망할 수 없기에  어느 쪽으로든 무지는 상상력의 부재를 불러온다는 셀프 깨달음도 있었고 세미나가 끝을 향해 가는 동안 인식의 한계가 언어의 한계이며 세계의 한계라는 걸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밤하늘을 쳐다보면서 다 똑같은 흐릿한 빛다발이 아니라 그것들 각각은 자신의 기원을 가지고 역동적인 움직임 가운데 변화하고 있는 천체라는 것, 그들이 각기 다른 진화의 과정에서 겪고 있는 일들을 인식하며 대상들을 본다면 좀 더 흥미로운 관측이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빈곤한 천문학적 지식이라도 별을 보는 일에 고갈되지 않는 연료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과 함께 이번 세미나를 통해 처음 별을 볼 때 느꼈던 의문들 중 하나였던 '관측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나름의 대답을 마련한 것 같다.   입문 초기부터 지금까지 아이피스를 쳐다보는 일 외에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본 것을 시각적으로 기술하는 일 혹은 본 것을 그림으로 묘사하는 일, 사실 그 둘 다에 관심이 없고 역사적으로 누가 발견했으며 뭘 어떻게 봤다더라도 그다지 관심이 없다.  다만 지금 내가 보는 것이 '무엇'인가에만 편협한 관심이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 형태나 모양보다는 궁극적으로 '정체'가 궁금했던  내게 이번 세미나는 매우 유익한 자극의 시간이 되었다.  물론 책의 절반도 소화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무지에 의한 매너리즘만은 피해 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희망도 보탰다. 


    우리는 너무 많은 빛 아래서는 눈을 감아버린다는 것과 어둠 속에서는 눈을 뜰지라도 아무것도 볼 수 없다는 것.  그러므로 우리는 어둠과 빛 사이 어디쯤에서 세상을 이해할 수 있다는 걸 별을 보면서 느꼈다.  관측지에서 맞는 일몰과 일출은 과거와 미래를 이어주는 문이 닫히고 열리는 것처럼 보였다.  망원경으로 영원처럼 보이는 것들을 바라보며 찰나를 사는 짧은 삶의 지루함이라는 아이러니에 대해서도 늘 생각한다.  별 보기는 경외감 외에도 내게 무엇보다 다양한 느낌과 감정을 선사함으로써 고생한 것 이상의 보상을 해주고 있다.  라바투트가 말한 지루함과 우울증은 바쁜 하루를  보냈다고 없어지는 감정이 아니다.   그건 생에 대한 태도이고 삶의 지루함과 실존적 우울감은 허무주의자가 갖춰야 할 기본 소양이기도 하다. 그는 문학이, 책이 그것에 대한 접근성을 제공한다고 했지만 내게는 뒤늦게 만난 별 보기가 삶의 한 구간에서 지루함과 우울증을 해소하는 아주 괜찮은 해독제가 되고 있다.     


    많이 모자란 사람의 황당한 질문에도 늘 친절히 답해주시고 긴 시간을 참아주신 참석자분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며

    다음 모임에서 마지막 챕터를 끝내고 다양한 이야기들을 많이 나눌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댓글 6

  • 이한솔

    2024.07.02 08:08

    이런 엄청난 필력 무엇! ^^
    예전에 천문지도사 연수 강좌에서 김병수님이 강의 했던 천문학 강의 제목이 기억 납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 양승희

    2024.07.06 22:32

    필력은 무슨..

    팔력으로썼습니다. 팔뚝힘 ㅎ

    전 무척 흥미로운 시간이었는데...무려 개근까지 했다는..

    개근상 안주나요 ㅋㅋ

  • 조강욱

    2024.07.11 20:51

    이런 소중한 세미나에 참석을 못하는 것이 너무 아쉽습니다 ^^
    지난 주말에 어느 외딴집 뒷마당에서 하늘 높이 떠오른 전갈을 보며 생각했지요
    나는 왜 별을 보는가? 멀리 있어서 더 아름다운 그 아련한 것들을.
    이번달은 처음 하늘을 올려다본지 딱 30년이 되는 달인데..
    아직도 답을 찾지 못한 것을 보면 앞으로도 못찾는게 아닐지.. ㅎㅎ

  • 양승희

    2024.07.16 22:19

    저도 하늘 높이 떠있는 전갈을 보고싶네요^^

    별을 보는 저마다의 사연이나 이유나 욕망이 다르겠지만...어찌 보면 인간의 욕망이 거기서 거기고 크게 다르진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합니다. 

    다만 언어로 환원되기 힘든 느낌과 감정이라 정의를 내리기 힘들 수 있겠지요.

    저는 단순무식이라 지루함을 해소하는 용도에 딱 들어맞았지만요 ㅋ

    게다가 싫증도 금방 내는 편이어서 앞으로 5년만 더 별을 보았으면 하는 소원이 있는데...

    조강욱님 30년 이라는 말을 들으니 아득하기만 합니다.  그 정도면 중독 아닐까요 ㅎㅎ



  • 정화경

    2024.07.24 03:40

    언제나처럼 멋진 글로 감상을 전해주시는군요^^
    저도 개근하고 싶었는데, 마지막 두 번은 참석하지 못하게 되었네요 ㅜㅜ
    휴가차 캐나다에 와있는데 이 곳 하늘은 지금 한국과 다르게 아주 청명합니다. 한국도 어서 장마가 끝나고 하늘이 좀 개이면 좋겠습니다 ㅎㅎ
  • 양승희

    2024.07.24 12:44

    저도 어쩌다 개근입니다 ㅎ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 되시고

    캐나다 맑은 하늘 맘껏 누리시고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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