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측기 & 관측제안 ~☆+

  • 집콕 관측 생존기
  • 조회 수: 1440, 2020-06-28 07:43:01(2020-06-07)

  • 매월 1회 이상 어딘가로 별을 보러 가는 것은 오래된 나의 루틴이다
    코로나가 세상을 지배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뉴질랜드 총리가 Lock down (집 주변을 제외한 전국민 이동 금지령)을 발표한 순간,
    나는 생존에 대한 생각 대신 더욱 원초적인 걱정이 들었다
    “별은 어떻게 보지”

    별을 보러 가지 못하면 다른 삶도 엉망이 된다
    회사에선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집에서는 짜증만 늘어난다
    나란 남자.. 나는 나를 잘 알지
    Lock down 기간동안 뒷마당에는 망원경이 항상 펼쳐져 있었다
    이건 망경이라기보다는 인공호흡기나 구급상자에 더 가까울 것이다

    이 와중에 이중성의 맛을 살짝 알게 되었고
    http://www.nightflight.or.kr/xe/237442

    새벽마다 하늘을 방황하는 (또는 질주하는) 화성을 챙겨보다가
    우연치 않게 토성이란 무엇인지도 한꺼풀 더 벗겨 보았다
    http://www.nightflight.or.kr/xe/238355


    그날 저녁, 퇴근하고 산책을 하고 들어오니 파란 하늘에 이미 달이 밝다. 
    세팅된 채로 정원을 지키는 망경으로 와이프님과 함께 달을 보았다.
    Moon_Sophie.jpg

    너무 보이는게 많은 것도 문제다. 
    LMC랑 달리 손댈 생각도 들지 않는다. 손각대로 증명사진만 하나 남길뿐..
    Moon_phone.jpg



    4월 4일 저녁엔 금성이 플레이아데스를 통과했다. 8년만의 일이라고 한다
    저녁을 먹고, 집 앞에서 마느님도 한번 보여드리고
    M45_HV.jpg

    해 지는 시간에 맞춰서 맨프로토 055를 어깨에 지고
    몇 년에 한번 꺼낼까 말까 한 15*70 쌍안경을 목에 걸고 동네 공원으로 향했다
    금단증상 안 맞으려고.. 애쓴다
    M45_park.jpg

    운동 나온 아줌마들과 동네 개들만 유유히 돌아다니는 어둑어둑한 공원에서 
    기를 쓰고 쌍안경 스케치를 하나 만들었다 
    Conjuncton of Venus and M45 4 April 2020.png

    애쓴다.
    감흥은 뭐.. 그저 그랬다



    다음날, 동호회 Jonathan Green 형님이 추천해준 대상인 Carbon Star를 찾아 보았다
    대체 무슨 색깔이길래..
    밝은 별인 남십자자리 Beta 별이랑 너무 가까워서, 너무 어두워서 한번 놀라고
    너무 희한한 색이라 또 한번 놀랐다
    별이 이렇게 빨간색이 될 수가 있나? 
    세페우스의 Garnet은 어땠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정도는 아니었던듯.. 
    DY Crucis the Carbon star 3 April 2020.png

    덤으로 Rigel Kentaurus 이중성 스케치도 한 장.
    Rigel Kentaurus 4 April 2020.png

    단순한 대상의 사실감 표현은 아날로그가 디지털을 이젠 절대 못따라올 것 같다
    내가 보는 것 그대로 – 밝기 / 색감 / 빛번짐 / 분위기 등 모든 것을 
    스마트폰에 터치펜만 있으면 99% 이상 똑같이 그릴 수 있다



    상현 반달이 뜬 어느 날, 집 뒷마당에 상주하는 망원경으로 
    달을 어떻게 한번 그려 보려고 했으나.. 전혀 용기가 나지 않는다
    대신 핑계만 앞선다
    1. 이걸 왜 그려야 하나? - 잘 찍은 사진을 보면 시상 좋을 때 안시 하는 것과 거의 비슷한 결과물이 나온다
    2. 이걸 어떻게 그려? - 석고 데생 하던 미대생도 아니고.. 기본기 없이 이건 도저히 안되겠다. 천세환님 그림으로 대리만족을..

    한참 핑계를 만들다가, 오래전에 리스트업 해 두었던 도전 대상이 생각났다.
    Plato 안의 Craterlets 찾기.
    그동안은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었는데.. 
    (항상 밤하늘에 볼 게 너무 많아서 이렇게 진지하게 달을 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시상이 괜찮아서 500배로 배율을 높여서 보니 얼핏 봐도 작은 구멍들이 보인다.
    2.44km짜리 Craterlet A가 제일 먼저 보이고 2km 전후의 Craterlets 6개를 찾았다
    오래된 숙제 하나를 해결한 것으로 스케치를 포기한 나약함을 물타기 해본다
    Plato.jpg
    (삼각형 안의 숫자는 보기 쉬운 순서)



    며칠 후, 
    퇴근하고 소파에 앉아 뒷마당을 바라보니 
    매일 조금씩 차오르던 달은 쟁반보다 더 크게 하늘에 덩그러니 떠올랐다

    달빛에 구름마저 빛나고, 
    왼편으로는 가로등불이, 
    오른편으로는 앞집의 창이 밝다. 
    우리집 정원 펜스에는 태양열 전구가 은은하게 빛난다. 

    사진을 찍어봤으나 도저히 표현이 안되어 터치펜을 꺼내 들었다.
    2000_The Lights 7 April 2020.png

    그리고 그 모습을 뒤에서 와이프님이 몰카를..
    Hidden_behind.jpg



    다시 며칠 뒤, 전국민 자가격리 (Lock down) 기간 중 유일하게 허용되는 운동인 동네 산책을 하러
    우리집 뒷길인 Clark Road를 걷고 있으려니 저 멀리 능선 위로 무언가 노랗고 거대한 빛덩이가..
    깜짝이야

    소에도 인적이 드문 동네 밤거리지만 시기가 시기인지라 더욱 을씨년스럽다. 
    (뉴질랜드의 최대 도시인 이곳 오클랜드에는 서울만한 면적에 서울 인구의 1/10정도가 살고 있다)
    2000_Orange and White in the dark 10 April 2020.png

    눈부신 달빛 아래로 오렌지색 가로등과 집안의 흰색 불빛이 가득하다
    세상이야 어떻든 달은 정확한 시간에 불빛 사이로 떠오르고 
    코로나로 일상은 잃었어도 삶은 계속된다



    다시 이틀이 지났다.
    일요일 이른 아침에 눈을 뜨니 콤비 블라인드 맨 윗칸에 달이 걸려 있다. 
    그 모습이 나름 인상적이라 잠결에 한장 그리고 다시 잠이 들었는데.. 
    다시 눈을 뜨니 달은 그 다음 칸으로 내려왔다. 
    전혀 다른 색으로.. 
    매 시 정각에 다른 달을 블라인드 다음 칸에 담았다. 
    달의 변화, 그리고 하늘색의 변화.. 마음에 든다. 
    2000_Between the Blind 12 April 2020.png

    유일한 단점은 매 시 정각마다 다시 같은 자세로 침대에 누워야 한다는 점.
    Blind_bed.jpg



    그사이 멀리서 천문연구원 천체사진공모전에서 6번째 은상 소식도 들었다. 대상 받을 때까지..
    Contest_silver.jpg


    또 며칠 뒤 4월 24일.
    동호회 회장님인 Bill Thomas 형님이 추천하신 Blue Planetary Nebula를 찾아보았다. 
    관측지에서도 잘 보이지 않을 조그만 행성상성운이 뒷마당에서 보일까? 
    내 책 별보기의 즐거움에는 “행성상성운은 이렇게 이렇게 보세요”라고 써 놓았지만
    정작 나는 행성상성운은 그다지 많이 보지 못했다

    남십자 위쪽에 위치는 쉽구만.. 찾았다! 
    오묘한 색깔이다. 
    OIII는 전혀 효과가 없어서 자연빵으로 폰스케치를 해 보았다. 
    NGC 3918 Blue Planetary Nebula 24 April 2020.png

    색깔 만큼은 내가 본 것이랑 완벽히 일치한다. 
    필름 천체사진이 거의 멸종된 것처럼,
    이제는 종이 성도 쓰는 사람이 더 드물어진 것처럼
    종이 천체스케치도 언젠가는 종말을 고하는 것이 아닐지 약간은 두려워진다.



    4월 26일.
    쉼없이 별을 본지 26년이 되었지만 남반구에선 아직 초보일 뿐.. 
    도시의 집 마당에서 볼만한 대상을 Paul Kemp 형님께 몇 개 더 추천을 받아서 찾아보았다.
    (머리만 벗겨졌을 뿐 형님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이 들긴 하지만..) 

    추천 대상들은 집앞의 가로등을 뚫고 보기에는 너무 흐릿하고..
    또 다른 회원이 추천한 NGC3242, Jupiter’s Ghost를 찾아보았다.
    에이 내가 설마 목성의 유령을 모를까요 선수끼리 왜 그래.. 하면서 호핑을 하고 보니
    천정에서 보는 목성의 유령은 오클랜드의 광해는 아랑곳 없이 놀랄만한 밝기를 보여준다.
    Wheres the Ghost 26 April 2020.jpg

    푸른 색감, 명확한 중심성, 진한 링 구조 뒤의 Shell까지.. 
    목성도 없고 유령도 없었지만 뒷마당에서 이정도까지 볼 수 있다는 것은 불가사의한 수준이다.

    행성상성운 스케치 전문 선수들의 일관되게 그로테스크한, 
    귀신 나올 것 같은 과장된 (것 같은) 스케치가 어디서 나온 것일까 항상 궁금했는데
    내가 직접 해 보니
    행성상성운은 원래 그렇게 생겼을 뿐, 못 보던 내가 이상한 것이었을 뿐...


    그리고 앞으로 전도 유망하다고 하는 (3등급짜리 육안 관측 혜성이 될 거라는)
    9등급짜리 혜성도 하나 찾아보았다. 
    1997년 헤일밥 이후 혜성을 10분 이상 본 것은 처음이었다. 
    C_2020 F8 SWAN 27 April 2020.png

    그저 그랬다



    Eta Carina 별은 아마도 밤하늘에서 유일하게 쉽게 관측할 수 있는 
    Eruption star일 것이다 (별 내부의 물질을 뿜어내는) 
    Eta_Carinae.jpg
    (출처 : 위키피디아)

    특유의 오렌지색 리본 모양의 분출물은 볼 때마다 모양이 달라지거나 아예 안보이기도 한다.
    몇년만에 다시 찾은 오렌지 리본은 또 모양이 변해 있었다. 
    2000_The Homunculus Star 26 April 2020.png

    삼렬성운 같은 진한 암흑대가 에타 카리나 별의 북쪽 성운기(?)를 종단하며 지나간다. 
    하늘에 이런게 보일 수 있다니.. 
    Eta Carina Closeup 2020.JPG

    보면서도 잘 믿기지 않는다.



    5월 6일.
    며칠전부터 SWAN 혜성이 갑자기 밝아졌다고 하는데 
    하늘은 갑자기 비와 구름이 가득하다. 
    며칠을 초조하게 허송세월 하고서 오늘 새벽에 드디어 맑았는데....
    에이 이게 뭐야. 
    C_2020 F8 SWAN 6 May 2020.png

    헤일밥에 길들여진 눈은 만족을 모른다. 
    감내하기 어려운 허기.. 집 말고 관측지에서 별 보고 싶다

    뻥스타, 아이뻥 같은 여느 뻥쟁이 혜성들과 마찬가지로, 
    SWAN 혜성도 또 하나의 Hall of Shame을 장식했다
    Hall of Shame.jpg
    * Hall of Fame(명예의 전당)의 유사품.. 
    (출처 : 페이스북)



    어느 맑은 주말 한낮..
    평소 같으면 어떻게든 별보러 나가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었을 시간에
    천천히 태양 망원경을 꺼내서 경위대에 올렸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로 굶어 죽을지도 모른다

    태양 관측의 최대 매력은.. 
    내가 지금 보고 있는 불꽃을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것일 것이다. 
    Hot Dog! 18 April 2020.png

    그리고 우리는 그 홍염들의 이름을 내 맘대로 지어서 부를 수 있다. 
    Prominence Gift Set 26 April 2020.png

    밤하늘에 있는 모든 대상은 꼭 이름을 불러줘야 한다는 것이 내 지론이다.



    한달 뒤, 드디어 Lock down이 풀리고
    금요일 저녁의 일정을 급히 취소하고 검은 하늘을 향해 달렸다
    칠흑같은 어둠을 한참을 달려서 도착한 Raglan 바닷가에는 
    오랜만에 별빛 포식을 하는 별쟁이들의 조용한 흥분과
    멀리서 들려오는 타즈만 해의 거친 파도소리,
    그리고 숨이 멎을 듯한 깨알 같은 별들 뿐이다
    아.. 살았다.

    20200502_145246.jpg


                               Nightwid 無雲

댓글 8

  • 정기양

    2020.06.07 22:33

    이렇게 집에서라도 별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워요. 어렵게 뉴질랜드로 이사간 보람을 찾았네요.
    Lock down이 풀린 것 축하합니다. 한국은 하늘이 더 안 좋아진 것 같아요... ㅠㅠ
  • 조강욱

    2020.06.28 07:39

    어렵게 남반구에 겨우 정착을 했으니 이제 목표를 이루어야지요 ^^
    한국의 하늘은.. 혼자만 이렇게 피신(?)해서 죄송합니다 ㅠ_ㅠ

  • 최윤호

    2020.06.08 21:18

    태양 관측에는 크게 흥미가 없었는데 독특한 홍염의 모양을 볼때 마다 나도 한 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들기도 하네요. ㅎ Hot dog는 너무 뜨거워서 인지 털이 빠져 날라 가는거 같아요. ㅋ
  • 조강욱

    2020.06.28 07:40

    몇년전에 불타는 소나무를 본 이후로 가장 지구상의 물체와 비슷하게 생긴 홍염이었음 ㅎㅎ

  • Profile

    김영주

    2020.06.10 00:36

    한국과는 너무 다른 뉴질랜드의 관측환경...거기에 조샘의 대리만족 가능할만큰 수준의 관측기.....
    한국과는 쨉도 안되는 목성의 유령...그리고 여기선 볼수없는 Eta Carina....너무 리얼해 온몸이 다시 근질근질 본능을 깨웁니다.
    태양도 언제쯤 그릴 수 있으려나? ㅠㅜㅠㅜ...슬픔만 한가득 가져갑니다
  • 조강욱

    2020.06.28 07:41

    관측 환경의 차이는 인구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 같습니다. 그 점은 어찌할 수가 없네요..

    태양은 우선 태양망경만 하나 구하시면 관측하는 것도 그리는 것도 딥스카이보다 훨씬 수월합니다 ^^

  • 김철규

    2020.06.17 19:28

    락다운 해제 축하합니다. 오랫동안 참았던 보람이 있네요. 그래도 뒷마당에서 그 정도면 그리 심하게 굶은건 아닙니다. 한국은 산속에 가도 그 정도가 안 보이는데가 점점 늘어나네요. ㅠㅠ
  • 조강욱

    2020.06.28 07:43

    그래도 가로등이 직격으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은폐 엄폐 하며 겨우 연명했습니다 ㅎ;;

    여기도 입맛에 딱 맞는 관측지를 찾기가 그리 쉽지는 않지만 한국의 어려움에 비할 수는 없을것 같습니다 ㅡ_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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