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측기 & 관측제안 ~☆+

  • 양치기소년의 교훈과 Leonid의 딜레마 (091118 사자자리유성우 관측기)
  • 조강욱
    조회 수: 8250, 2009-11-20 10:25:44(2009-11-20)
  • 옛날옛날 한옛날, 별나라에 양치기 소년이 살고 있었습니다

    1990년대 중반부터 이 소년은 자신있게 소리쳤습니다

    "1999년 11월에 늑대가 나타난다! 1866년 이후 최대 규모의 늑대 떼다!!"

    군대에서 병장 놀이에 열중하고 있던 Nightwid는 이 날만을 몇 년동안 손꼽아 기다려 왔었습니다

    저뿐인가요? 전국 대학 별나라 학생 연합 (UAAA) 집행부 친구 하나는 'Meteor99'를 아이디로 쓸 정도였습니다

    시간이 흘러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 날이 왔습니다

    언론에서는 벌써 한참 전부터 20세가 마지막 우주쇼라고 호들갑을 떨고 있었고,

    저는 나도 휴가가고 싶다는 쫄다구들의 원성을 못들은 체하고 치악산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유성은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아 이런 신발샛길 같은..... 고귀한 육군 병장님께서 피같은 휴가를 내고 오셨는데 이게 머냐!!!!

    허망하게 양치기 소년을 째려보니, 유성우 예보는 원래 변수가 많다며 내년이 더 기대된다고 둘러댑니다

    ..........

    2000년 11월, 예비역이 되어 치악산 폐교 그 곳에 다시 갔습니다

    조촐했던 99년에 비해 00년 11월 어느날 치악산 폐교 운동장은 수백명은 될 듯한 여러 대학교 동아리 학생들로,

    좀 과장해서 얘기하면 발 뻗고 눕기도 어려울 지경이었습니다

    밀레니엄 최초의 우주쇼라는 전파낭비 낚시질이 부른 결과인 것 같습니다

    위에 전파낭비라고 쓴 것처럼 이번에도 늑대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단 하나. 동쪽 하늘에서 서쪽 하늘 끝까지 오리온을 배경으로 천천히 흘러갔던 fireball 하나는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귀를 빵꾸낼 것 같은 여학생들의 비명소리와 함께.. =_=;;;


    양치기 소년은 이제 신뢰를 잃었습니다

    올해는 극대 시간이 잘 안 맞아서 지구 반대편 스페인 쪽에서 잘 보였고,

    내년(2001년)엔 진짜 진짜 많이 보일거라고....

    하지만 모두들 흥!! 콧방귀만 뀔 뿐이었죠


    01년에도 11월은 어김없이 돌아왔습니다

    라디오에는 그룹 '11월'이 성수기를 맞아 공개방송마다 출연하고, '잊혀진 계절'도 신청곡으로 한참 나왔습니다

    양치기 소년은 거대한 늑대 무리가 온다고 거품을 물었지만, 별나라에선 싸늘한 반응 뿐이었습니다

    언론에서는 '금세기 마지막 우주쇼', '밀레니엄 우주쇼'에 이어 '21세기 최고의 우주쇼'로 타이틀만 바꾸어 연일 전파에 태웠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뭐든 삼세번은 해 봐야 하나 봅니다

    그렇게 낚시질을 당하고도 또 어느새 꾸역꾸역 슬라이드 필름을 사고 릴리즈를 고치고 늑대가 나타난다는 날을 기다립니다


    D-day 전날, 지금은 무주 반디별천문과학관에 계신 박대영 형님의 호출을 받았습니다

    대영B     : '가자'
    Nightwid : 'Call~!'

    아무런 고민이나 양심의 가책 없이 동아리 애들을 버리고 대영B를 따라 가기로 했습니다

    화천에 무슨 수련원이라고 합니다

    97년에 UAAA 집행부에서 같이 활동했던 동기들과 어느 건물 옥상에서 자리를 펴고 누웠는데....

    그렇게 기다리고 또 기다리던, 바로 그 늑대가 나타났습니다

    그것도 수천 마리가.... 전방위에서, 다양한 색깔과 밝기와 길이와 속도와 유성흔을 가지고....


    다른 곳으로 관측을 간 학교 후배들은 2960개까지 세다가 포기했다는데,

    저는 50개 정도 세다가 진즉에 숫자를 까먹었습니다

    빨간유성 파란유성 찢어진유성 커플유성 점유성 폭발하는유성..........

    온 하늘을 환하게 밝히는 fireball은 필시 유성흔을 남기게 마련입니다

    화구가 터진 위치를 쌍안경으로 보면, 유성이 타고 난 흔적이 마치 용이 승천하려고 꿈틀거리는 것처럼

    역동적으로 오래도록 변화무쌍하게 움직입니다

    30초, 5분, 30분..

    유성은 꼭 순간적으로 보이는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유성이 떨어지기 전에 소원을 7번 반복해서 빌어야 이루어진다는 빡신 속설 때문에

    다들 '놈놈놈놈놈놈놈', '년년년년년년년', '돈돈돈돈돈돈돈'을

    유성이 떨어지는 찰나의 순간에 얼마나 빨리 발음하는지에만 열중했었는데,

    30분 동안 18000번은 반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넋이 나가서 소원을 빌 생각도 못 해 봤습니다

    처음엔 하나씩 떨어질 때마다 카운트를 하며 다 같이 환호를 했었는데..

    한 시간쯤 지나서는 늑대가 한 마리 나타날 때마다 '아!'하는 단말마의 비명만을,

    새벽녘이 되니 목소리도 안 나오고 한 개 지나갈 때마다 몸만 움찔움찔 합니다

    좀 섬뜩한 비유이긴 한데,

    영화 '친구'에서 마지막에 장동건이 칼을 맞아 죽을 때,

    나중에는 비명도 못 지르고 배에 칼이 들어올 때마다 몸만 들썩 들썩 하던 것이 기억이 납니다

    고마 해라.... 마이 무었다 아이가....

    부모님이 쓰시던 내 나이만큼 오래된 수동 카메라를 들고 갔는데,

    하필 이 중요한 날에 싸구려 삼각대가 일주 촬영중에 모가지가 똑 부러지는 바람에....

    어디 구도 잡을 엄두도 못내보고 그냥 B셔터 열어놓고 하늘을 향해서 땅바닥에 내려놓고 찍었습니다

    그래도 눈 먼 유성들이 한 장에 대여섯개씩은 나오더군요

    학교 후배 하나는, 보름달 같이 밝은 유성이 폭발한 자리를 내가 쌍안경으로 넋놓고 보고 있을 때

    표준 렌즈로 점상 촬영을 했었습니다

    인화한 사진을 보고, 안한다는 것을 억지로 천체사진 공모전에 출품을 시켰는데..

    다음해 동방의 천문달력에는 그 사진이 자랑스럽게 실리게 되었죠.

    물론 상금은 받자마자 술로 변신하여 입 속으로.. ㅋ;;

    돌아오는 새벽은 월요일이라, 동이 터올 무렵 아쉬운 발걸음을 돌려야 했습니다.

    돌아오는 차창 밖으로도, 날이 밝은 후 길가에서도 유성은 계속 떨어졌습니다

    '영화학 개론' 이라는 오전 교양 수업을 들었는데, 강단의 칠판 앞으로도 유성이 계속 지나갑니다

    등 뒤에서 시작해서 칠판 속으로 슉~슉~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제가 지금까지 본 유성이 3000개 정도 될 것 같은데, 그 중 2/3를 그 날 보았습니다


    하지만, 마냥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심각한 부작용이 하나 생겼는데..

    페르세우스 유성우, 사분의자리 유성우, 쌍둥이자리 유성우....

    이젠 유성 불감증에 걸려서 그 어떤 유성우 이벤트에도 마음이 동하지 않습니다

    나는 이대나온 여자도 아닌 '2001 Leonid를 본 남자'이기 때문이죠.. ㅡ_ㅡ;;;

    그래서, 꽤 자주 쫓아다니던 유성우 관측회를 두번 다시 가지 않게 되었습니다

    헤일밥 이후로 혜성 안 보는 것과 비슷한 증상이죠..    콜록 =_=;;;;


    그로부터 8년 후, 그때 그 양치기 소년이 뜬금없이 다시 나타났습니다

    (이제 8년이나 지났으니 양치기 청년이라 불러야겠네요)

    "올해도 늑대가 제법 나타날거다~~~!!!"

    33년 주기의 Leonid가 왜 8년만에 오냐?

    이런 논리적인 질문은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머리 속에는 2001년의 황홀했던 유성비 내리던 기억밖에.

    D-day는 11월 18일 새벽.

    옮긴 부서에서도, 나는 원래부터 미친nom이라는 것을 빠르게 포지셔닝을 시켜 놓아서

    주중에 별보러 간다고 해도 아무도 막지 않으시더군요 ㅡ_ㅡㅋ

    이 날은 김상준님께서 양평의 별장으로 초청을 해 주시어 아주아주 편하고 쾌적하게 관측을 할 수 있었습니다

    (김상준님 정말 감사합니다~~~~ ^-^)

    밀린 업무를 마치고, 밤 11시가 넘어서 양평으로 출발..

    12시가 넘어서 도착하니 이미 집주인 김상준님을 위시하여 김남희님, 이재희님, 권병규님이 와 계셨습니다

    유혁님도 바로 도착하시고.. ^^ (유성우는 여럿이 보고 환호성을 질러야 제 맛이라고 제가 막 꼬셨습니다  ㅡ_ㅡㅋ)

    저는 옆 부서에 근무하는 천체에 관심이 많은 과장님을 모시고 갔는데,

    간이 의자와 야전 침대를 준비해 오셔서 아주 럭셔리하게 유성우 관측을 할 수 있었습니다

    계수 관측법, 경로 관측법, 라디오 관측법.. 다 필요 없습니다

    그냥 야전침대에 침낭 돌돌 말고 누워서 하늘만 쳐다봅니다

    남들보다 한참 늦게 첫 유성 개시를 하고 하나씩 숫자를 세는데,

    이건 너무 심하게 띄엄띄엄이더군요 =_=;;;;

    나중엔 나도 모르게 누워서 졸다가 화들짝 깨서 다시 하늘을 봐도

    유성은 토목과에서 여학생 찾기보다 더 어렵습니다

    그래도, 가끔 보이는 애들은 보통때의 유성보다 더 빠르고 더 밝고 유성흔이 작게나마 남는 애가 많습니다

    하늘은 엄청 맑고 달도 없는 밤이었지만,

    망원경도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유성우를 즐기러 간 것이었기에 다른 욕심은 내지 않았습니다

    결론은... 꽝!!


    양치기 소년은 아니 양치기 청년은 꽝이 나도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그저 조용히 사라졌다가

    11월이 가까워오면 또 나타나겠지요.  각종 매스컴을 등에 업고서....

    내년엔 부동산 가격이 하향 안정세를 유지할테니

    추격 매수를 자제하고 관망세를 유지하라고 전망한 소위 부동산 전문가가

    집값 폭등했다고 책임 지는거 보셨나요 ㅎㅎ


    대부분의 별쟁이들은 늑대가 나타날 거라는 양치기 소년의 전망을 기본적으로 믿지 않습니다

    하지만 낚이고 또 낚여도 양치기 소년의 뜻대로 움직일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언젠가 한번 분명히 다시 올 그 대박을 놓칠 수가 없기 때문이죠....

    그 한 번의 대박을 놓치고 땅을 치고 평생 후회하느니

    매년 11월마다 속는셈 치고 보험든셈 치고 산속에서 하룻밤 달달달 떠는 것이

    훨씬 속 편한 선택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양치기 소년의 교훈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언제 올지 알 수 없는 Leonid를 간절히 기다리는 딜레마.

    사자자리 유성우도 깊은 '감질맛'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는가봅니다.




    P.S. 1

    관측기록 백업용으로 만들어 놓은 블로그에 2001 Leonid 관측 기록이 있더군요..

    http://nightwid.egloos.com/1111290#1111290_1



    P.S. 2

    사진 찍은 애한테 예전에 허가 받았던 사진이니 올려도 괜찮겠죠.. ^^;;

    2002년 제10회 천체사진전 은상 수상작 [불새]


    관측자 : 김종문

    장비 : PENTAX SP2 55mm

    노출 : 조리개 F2 30초



    P.S. 3

    11월 19일은 2001년에 Leonid가 재림하신 성스러운 날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11월 19일이 결혼 기념일이란 것입니다

    회사에서 야근하느라 결혼 4주년 기념일도 못 챙긴 간 큰 남편을 둔 원장님께 2001 Leonid를 봉헌하는 바입니다.. ^-^

    (그래도 2MB보단 스케일이 작은 듯....)




                    Nightwid 我心如星

댓글 4

  • 유혁

    2009.11.20 17:47

    시간 반 남짓이었지만 오랜만에 별빛 구경도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참 좋았습니다.
    어차피 저는 유성 구경을 하러 갔다기 보다는 맑은 날씨에 오랜 만에 이것 저것 보러 갔던 것이니까요....

    김남희님 망원경으로... 이것 저것 들여다 보았는데... 그러느라 유성 몇개를 놓친 것 말고는... 아주~~~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기쁜 마음에 들떠서 집에 가다 보니 늦은 시간인데도 전혀 졸립지 않게 운전을 할 수 있어 다행이었습니다.

    그런 기회가 있으면 또 불러주세요... ^^;;

  • 조강욱

    2009.11.22 17:31

    너무 짧은 시간동안 찍고 가셔서 저는 좀 아쉬웠는데.. ^^;;
    잼있게 보시고, 조심히 가셨다니 다행입니다~~~
    다음 사자자리 유성우는 대박 나길....
  • 김희준

    2009.11.23 13:10

    조강욱님.. 양치기와 유성우... 한 글솜씨 합니다.

    대개 웹에서 긴글은 읽다가 말고 접는 데 끝까지 재미있게 잘 봤읍니다.

    화려한 기억과 수 많은 실망들이 어우러져 있어 나름 유성우에 대한 애착도 강하게 느껴집니다....

    저도 과천에서 멍석 깔고

    다음날 눈이 가물가물 할 정도로 긴밤을 꼬박 지새웠읍니다만...

    아쉬움이 많이 남더군요...
  • 조강욱

    2009.11.23 19:26

    안녕하세요 ^^ 수원에서 뵙고 저녁에 술 한잔 같이 못해서 아쉬웠습니다 ^^;;

    제가 글을 짧게 요약해서 쓰는 것을 잘 못해서..

    그리고 내가 기억하려는 목적으로 쓰는 것이라 나에게만 필요한 디테일을 첨가하는 일이 많아서

    다른 분들이 보기에는 더 힘들어질 수도 있겠습니다 ㅎㅎ

    밤하늘 아래에서 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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