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측기 & 관측제안 ~☆+

  • 끝없는 욕심(4) – 별 것 아니지만 보기 힘든 것
  • 조회 수: 671, 2021-01-13 03:53:45(2021-01-10)


  • 12월 17일 저녁, 나는 이 그림을 꼭 그려야만 했다. 
    평생 다시 오지 않을 기회였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녁을 먹고, 예정되어 있던 화상 영어수업을 제끼고 밖으로 나섰다

    구름 예보는 그리 낙관적이지 않았지만 구름 사이의 틈은 헛된 희망을 품기에 충분했다
    이쯤이면 초승달이 보여야 할텐데..

    구름과 가로등을 피해 온동네를 떠돌고 다니다가 
    동네 한구석에 위치한 공사장 앞에서 극적으로 세 빛덩이를 알현했다.

    멋지다
    두 행성이 숲 뒤로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보며 그림을 그렸다

    2000_D-4, The Art of Conjunction 17 December 2020.png



    12월 18일 D-3

    다음날 밤, 금요일 업무를 마치고 바로 관측지로 향했다
    주말 예보가 별로 좋지 않았다

    박명은 밤 9시반이 넘어야 될테고..
    낮부터 크게 무리하지 않고
    운전도 편안히 천천히 하고
    관측지에 일찍 도착해서 운전석 뒤로 젖히고 한참을 쉬었다
    밤샘 컨디션 관리를 위해..

    9시쯤 되어 밖으로 나오니 목성부터 차례로 모습을 드러낸다. 
    고작 하루 차이인데도 달은 이미 저 멀리에..
    놀면 뭐하니. 그려보자

    2000_D-3, Waiting for the Maximum 18 December 2020.png

    실제 비례는 달의 시직경이 훨씬 더 크겠지만 
    그림이니 마음 가는대로..

    시간이 지나 행성도 달도 지고
    별보는게 뭐하는건지 궁금하다며 따라온 지인도 돌아가시고
    자정 즈음.. 이제 별좀 볼까.. 하는데 다시 잠이 쏟아진다

    낮에 아무리 페이스 조절을 했어도 소용이 없다
    침대에 누워서 대낮에 강제 취침을 하지 않는 이상 더이상 밤샘이 안되는 수준이 되었다
    졸음과 피곤을 견디지 못하고 망원경 앞에서 비몽사몽 하다가
    차에 들어가서 알람을 5개씩 맞춰놓고 쪽잠을 자고 일어나기를 반복하다가
    결국 알람 세팅 버튼을 미처 누르지 못하고 폰을 손에 쥐고 운전석에서 그대로 잠이 들었다.

    동이 틀 무렵이 되어서야 놀라서 눈을 떴다
    이미 시간은 새벽 4시…. 이 좋은 하늘을 허망하게 졸면서 보내다니.
    뭐라도 해보려고 정신줄을 다잡고 급하게 LMC의 점들을 종이 위에 옮기고 있으려니
    30분도 되지 않아서 하늘이 밝아지기 시작한다 
    이내 아이피스에 보이는 별들도 바람결에 흩어지는 먼지처럼 아득히 사라졌다

    KakaoTalk_20210110_014542254.jpg

    내가 원할때 밤새 별을 볼 수 없다니
    슬픈 일이다
    앞으로는 예전같은 주중 관측을 더이상 나가기 어려울 것이다
    아직 밤하늘 아래에서 해야 할 일이 많은데.. 
    몸이 언제까지 그걸 허락할지 나도 모른다



    12월 19일 D-2 

    관측지에서 밤새 푹 자고서 쌩쌩하고 찝찝한 정신으로 집에 돌아왔다
    안좋을 거라고 포기한 토요일의 하늘은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루종일 파랗다
    어짜피 망경은 차에 아직 실려있고..
    뭐라도 해봐야지

    저녁을 먹고 차를 끌고 밖으로 나왔다. 
    망원경 펼 곳을 찾아 동네를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쓸데없이 넓고 적당히 외진 주차장을 발견했다. 
    영업을 하는건지 의심스러운 낡은 볼링장 주차장인데 
    과연 공이 앞으로 굴러갈까 싶은 쓰러져가는 볼링장의 수용인원을 초과하더라도 
    그 넓은 주차장의 절반도 채우지 못할것 같다

    2000_20201219_211659.jpg

    석양빛을 감상한다고 여유를 부리는 사이 목성이 나타났다. 
    아직 망원경도 다 못폈는데..

    허겁지겁 망경을 세팅하고 목성을 겨누니
    13mm Ethos 한 시야에 두 행성이 잡힌다
    100도 시야의 돈값은 하는구나

    서쪽의 집들 뒤로 넘어갈 때까지 
    아이피스 안의 그 모습을 최대한 그대로 담아보았다

    2000_D-2, Into the Field of View 19 December 2020.png



    12월 20일 D-1

    D Day가 가까워질수록 별하늘지기와 페이스북은 온통 두 개의 점으로 도배가 된다
    400년만의 만남이라고 뉴스에도 나왔는지
    별쟁이가 아닌 지인들도 계속 연락이 온다.
    어디서 어떻게 볼 수 있는지?

    “서쪽 지평선 바로 위에서 어두워지기 전에 빛나는 두 별을 찾으세요”
    나름 명확한 설명이라 생각했는데,, 별쟁이 외에는 대부분 못 찾으신듯.
    얼마나 낮고 어두운 대상인지, 서쪽이 대체 어디인지, 
    배경이 얼마나 어두워져야 보인다는 것을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2000_20201220_210426.jpg

    어제 그 장소, 쓸데없이 넓고 적당히 외진 주차장에 다시 갔다
    오늘은 가족들과 함께,
    그리고 뉴질랜드 교민 한분도 그 400년만의 진귀한 무언가를 보러 그 주차장으로 직접 오셨다

    2000_20201220_210019.jpg

    2000_20201220_205900.jpg

    구름 한점 없는 하늘은 점점 어두워지고
    목성과 토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망원경으로는 이제 8mm Ethos에도 한 시야에 들어온다

    갈릴레오 4대 위성의 바로 뒤로 기가 막힌 위치와 밝기로 붙어 있는 별 때문에..
    갈릴레이 위성이 5대 위성이었나.. 잠시 멘붕에 빠졌다 
    스카이사파리가 없었으면 학계에 큰 파문을 일으킬 논문을 완성할 뻔 했다

    2000_D-1, The Grandeur Combination 20 December 2020.png

    망원경으로 평생 처음 목성과 토성을 보신 지인이 
    그 탈 지구적인 모습에 연신 감탄사를 날리다가 말씀하셨다
    멋지네요.. 근데 왜 꼭 오늘 이렇게 이걸 봐야 하는건가요?

    2000_20201220_211027.jpg

    내가 대답했다
    사실 별거 없어요 안봐도 세상 망하지 않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요
    근데 오늘 못보시면 몇백년 더 기다리셔야 해요

    우리는 더이상 두 별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한참을 더 서쪽하늘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두 별은 더욱 더 가까워졌다
    맨눈으로 보는 조합도 멋진데 배경에는 주택가가..
    이걸 어떻게 그려. 
    나는 내 그림에 인공 구조물을 넣는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별이라는 자연물과 조화도 잘 되지 않고 내 그림 실력으로는 그리기도 어렵다

    건물은 빼고 하늘색과 두 별의 위치만 그리고 집에 왔는데
    이름없는 별 님의 그림을 보고 용기를 얻었다

    csh.jpg
    (출처 : https://cafe.naver.com/skyguide/256233)


    다음날 다시 같은 장소에서 어제 그려둔 별하늘 그림에 건물만 더 얹어 보았다

    2000_D-1, Are you getting ready for Christmas_ 20 December 2020.png

    하늘 그리는데 30초
    건물 그리는데 30분
    그림을 좀 더 배워봐야 하나.. 마음에 안든다



    12월 21일 D-Day

    연초에 알바하는 망경회사 Andrew 사장님과 
    12월말에 올 Conjunction에 대한 얘기를 하면서도 
    너무나 먼 미래처럼 생각이 되었는데
    어느새 그 날이 되었다.
    2020년은 너무나 많은 일들이 있었지..

    날씨는 하루종일 흐리다.
    대영형님이 과천과학관 목토성 근접 라이브 방송에 뉴질랜드 특파원으로 고용하겠다고 스카우팅을 하셨는데
    업계 최고 수준의 연봉이 보장되지 않아서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실은 흐림으로 점철된 시간별 날씨 예보를 보고서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꽝이라 생각하고 아무 생각 없이 퇴근하고 저녁 식사를 하며 서쪽 하늘을 보니 
    회색 구름 사이에 파란색 틈이 보인다

    먹든 못먹든 나가보자. 다음 최근접 때까지는 살아 있을 자신이 없다
    3일동안 같은 곳에서 망원경을 펴고 별을 보는데
    아무도 오지 않는다. 
    저 멀리 주택가의 사람들도 크리스마스 파티에 바쁠 뿐 하늘을 쳐다 보는 사람은 없는듯 하다
    어서 서쪽 하늘을 보라고 얘기해주고 싶다가도
    내 관측시간 뺏길까봐 그냥 조용히 혼자 보았다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서쪽 하늘의 파란 틈이 점점 더 커지다가
    드디어 두 별이 나타났다
    와우…. 과천과학관 특파원 할걸 그랬나

    2000_20201221_211200.jpg

    무의식중에 그림이 아니라 사진을 찍느라 시간을 보내다가
    다시 구름이 몰려오는 것을 보고 정신 차리고 
    드로잉 앱으로 육안으로 보이는 하늘색과 두 별 위치만 그려놓고 망원경을 잡았다

    5분여 시간동안 8mm 아이피스 230배로 보면서 스케치를 하고 있으니
    두 행성은 구름 뒤로.. 서서히 빛을 잃어가며 사라졌다.
    제대로 감상할 여유도 없이..
    어제 갈릴레이 위성을 5개로 만들었던 그 별이 오늘은 이오 바로 위에서 나를 더욱 혼미하게 만든다

    목성과 토성이 구름 뒤로 사라진 뒤에, 기억에서 희미해지기 전에 
    망원경 앞에 앉아서 그림 한 장을 완성했다

    2000_The D Day, 21 December 2020.png

    봤다는 것 자체로 만족하면서도
    그 귀한 시간을 잘 찍지도 못하는 폰사진 구도를 잡느라 허비한 것이 못내 아쉬워졌다 

    6번의 개기일식을 경험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감상법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 생각났다
    그리고 그걸 알면서도 또 같은 실수를 스스로 되풀이하는 것을 보니
    이것도 몇번 더 봐야 그 맛을 알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며 찍어놓은 저퀄리티 사진들을 어떻게 쓰나 하다가
    육안 스케치로 30초만에 그려놓은 밑그림에 
    사진을 참조하며 구름과 다리를 그려 넣었다
    역시 기억에서 더 희미해지기 전에..

    2000_D Day, The Decisive Moment 21 December 2020.png

    다리 30분, 구름 30분.
    그래도 이건 어제 그린 건물보다 좀 더 마음에 든다.

    비록 단 5분이었지만 못볼줄 알았던 최근접 당일의 증인이 될 수 있어서
    복권 당첨된 것처럼 기분이 좋다
    상상했던 그 모습(두 행성이 합쳐져서 거대하고 강력한 한줄기 빛덩이가 되는..)은
    전혀 아니었지만 말이다



    12월 22일 D+1

    오늘은 어제보다 더 흐리다
    아무 기대 없이 퇴근해서 집안일을 하고 있는데
    서쪽하늘에 파란하늘 한조각이 언뜻 보인다
    가자. 가야겠다

    급히 나갈 준비를 하고 있으니 보스님이 한마디 하신다
    "또 가?"
    “400년만이라서..”

    별 것 아니지만 보기 어려운 것, 그것이 천문 이벤트의 본질이 아닐까?
    4일째 똑같은 주차장에 망원경을 펼쳤다
    망원경을 펴는게 바보같아 보일 정도의 구름 가득한 하늘.

    2000_20201222_211417.jpg

    어쨋든 왔으니 가야지
    목토성이 있을만한 곳을 파인더로 맨눈으로 하릴없이 방황하고 있으니
    구름이 조금 옅어지는 틈으로 밝은 점이 하나 나타났다.
    깜짝 놀라서 황급히 아이피스로 몸을 움직인다 
    메시에 마라톤에서 마지막 대상을 찾은 기분이다

    목성, 토성, 목성 패턴은 이렇게.. 카시니는 안보이고.. 
    그리고 목성에 딱 붙어 있는 점 하나. 
    점? 이건 뭐지?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다시 아이피스 시야의 대상들이 흐려진다
    다시 구름이다. 3초쯤 본 것 같다

    다시 나타날 때까지 내가 본 것들의 색과 모양을 생각하며 밑그림을 그리고 있으니
    구름 사이에서 무언가 반짝.

    다시 허둥지둥 파인더로 대상을 겨누고 아이피스에 눈을 대니 
    두 행성이 나타났다가 1초만에 다시 사라졌는데 
    목성 옆의 점은 보이지 않는다

    혹시?
    스카이사파리를 돌려보니
    역시나 목성의 영이었다
    목토성을 230배 한시야로 보고 있는 와중에 이런 행운이.. 
    길가다가 오만원짜리 발견할 확률보다 더 희박할 것이다

    어떻게든 그림으로 남겨 봐야겠다
    남아있는 기억 만으로 그림을 그리기엔 색과 형태가 명확하지 않은게 많아서
    서쪽 하늘을 10분여 더 사주경계하다가 두 행성이 지평선으로 넘어가기 전에 
    마지막 1초를 더 만나볼 수 있었다

    3회에 걸친 총 관측시간 5초.
    개기일식 스케치를 나중에 하는 것처럼 5초간의 기억을 끊임없이 되새김질 하면서 
    마지막 그림 한 장을 남겼다

    2000_D+1, 5 seconds moment 22 December 2020.png



    다음날부터는 며칠간 비 예보가 있다
    다행이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복잡한 심경을 별쟁이라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Nightwid 無雲

댓글 4

  • 천세환

    2021.01.11 00:44

    스크롤 내리다가 놀랬어요. ㅋㅋ 제 그림이 새로운 자극이 되었다니 영광입니다. ^____^
  • 조강욱

    2021.01.11 13:14

    천세환님 달그림은 자극이 아니라 좌절이 됩니다 ㅎㅎㅎ

  • 최윤호

    2021.01.12 02:43

    몇 백년 동안 일어나지 않을 일을 남긴 것을 먼 훗날 다시 돌아봤을때 너무나도 흐믓할 거 같네요. 저도 그래서 처음으로 어포컬로 찍은 허접한 사진을 평생 간직할 겁니다. ㅎ
  • 조강욱

    2021.01.13 03:53

    ㅎㅎㅎ 그 사진 나도 보고 싶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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